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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대 순조 : 서초구 헌인릉(인릉)
    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3:44

    -23대임금 순조-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순조 대는 17, 18세기를 통한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순조대의 정치적인 대표적인 사건은 후에 외교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천주교 박해를 들 수 있다.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며 정적인 사파와 남인을 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순조의 친정 뒤에 이어진 을해박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이어졌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었고, “의빈 성씨”와의 사이에서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공”이 1800년(정조 24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이 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니 순조다.

     그러자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11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을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은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조 후기에 마련되었던 영, 정조대의 문화적 황금기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순조 대이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 하였었다는 이유로 정조의 미움을 받아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가 죽은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로서 이때부터 김귀주의 복수를 하기 시작한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노론 벽파는 반대파인 시파와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자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할 것을 명한다.

     이리하여 2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해가 신유년 이었으므로 ‘신유박해’혹은‘신유사옥’이라고 한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를 했고 『이승훈』과 『정약용』등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배교를 약속해 귀양을 가게 된다.

     이때 숨어서 전도를 하고 있던 『주문모』신부는 감옥에 갇힌 신자를 구하려고 ‘의금부’에 자수한다.

     그러나 결국 『주문모』신부는 처형을 당했고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밝혀져 사약을 받았으며 강화도에 귀양을 갔던 『은언군』<1786년(정조10년) 아들

    상계군 담이 모반죄로 강화에 강제 이주하였다>도 사약을 받는다.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은 나중에 25대 임금이 되는 철종의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가 ‘신유박해’때 사약을 받는 바람에 이원범(철종)은 아버지 『전계군』과 함께 강화도로

    쫓겨나 살게 된다.

     전계군은 왕족이었으나 이런 이유로 전혀 왕족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이원범(철종) 또한 강화도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나무를 하는 무식한 농부로 자라게 된다.

     신유사옥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으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일이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 들이는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이 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촌 오라비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순조2년(1802)에 어린 왕은

    안동 김씨로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에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된다.

     “김조순”은 원래 정조편에 서 있던 시파계 일문이었으나 규장각대교당시 탕평을 건의 하는 등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으로 벽파 세상이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 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동안 실군을 쥐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을 방해한 죄목으로

    귀양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렸다.

     이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어린 왕을 곁에 모시면서 세도정치의 첫장을 열게 된다.

     김조순은 벽파를 몰아내고 남인과 시파 및 안동김씨를 대거 등용한다.

     안동 김씨들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고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는 데만 신경을 쓰며 이리하여 곳곳에서는 매관 매직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백성들은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전정은 땅 넓이를 기준하여 물리던 세금인데 부패한 관리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을 세금을

    물리게 하는 등 심지어는 없는 땅에까지 세금을 물린다.

     군정은 영조때에 균역법을 실시하여 좀 나았으나 순조가 즉위를 하면서 다시 문란해져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 주었다가 다시 가을에 1/10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받는

    제도인데 이 역시 부패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져만 간다.

     그러자 평안도 출신으 『홍경래』는 여러 번 과거시험을 통하여 관직에 등용하기를 바랬으나

    매번 안동 김씨에 의해 등용이 여러 번 좌절되자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난다.

     또한 홍경래는 가산의 부자 『이희저』와 곽산의 진사 『김창시』등을 맞이하고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여 순조 11년(1811)12월에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다.

     홍경래는 일주일 만에 청천강 이북을 손에 넣는다.

     이때 선천부사 『김익순』(김삿갓 김병연의 조부)과 철산부사 등은 전혀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한다.

     그러나 결국 반란은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이 되고 홍경래도 관군의 총에 죽게 된다.

     난이 평정된 후 홍경래에게 항복을 하였던 신천부사 김익순은 참형을 당했고,

    그 후 그의 손자 『김병연』이 그 사실을 모르는 채 향시에서 조부를 욕하는 시로 장원에 급제를 하게 된다.

     김병연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자 충격을 받고 하늘에 있는 조상 보기가 부끄럽다고 삿갓을

    머리에 쓴 채 집을 떠나 전국을 떠도는 방랑시인이 된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이는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의 전횡을 모릴 리 없던 순조가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함으로서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잠시 풍양 조씨 일문에게 권력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헌종의 할머니)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다시금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또한 후에 철종비 까지 안동 김씨 일문에서 냄으로써 안동 김씨의 외척 세도 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 34년(1834)왕이 45세로 죽게 되자 세손<일찍 죽은 효명세자(익종)의 아들>이 8세의 나이로

    즉위를 하니 24대 임금 헌종이다.

     순조의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 순조의 가족들

     순조는 순원왕후 김씨 외에 숙의 박씨가 있을 뿐이다.

     순원왕후 김씨가 후에 익종으로 추대된 효명세자를 비룻하여 4녀를 낳고,

     숙의 박씨가 1녀를 더 낳았다.

     

    * 순원왕후 김씨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마침내 18-2년(순조 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이 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루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난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쳐 손을 쓰기도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함으로써 왕의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서 안동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 효명세자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현하는 등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다툼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를 한뒤 익종에 추존이 된다.


    *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성립

     세도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사람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이다.

     이것이 정조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맡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이 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당파에 의한 당쟁의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의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정권이 형성된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친 60여 년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김씨 세도 정권은 정조로부터

    순조를 잘 부탁 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조가 죽고 1800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를 하자 그때까지 당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조순은 시파계임에도 불구하고 벽파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함으로써 후에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데 성공 한다.

     대비의 수렴청정 기간에는 대비의 외척인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벽파계가 정권을 잡는다.

     그러다 1804년 순조가 15세 되던 해에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그 다음해에 죽자 순조의

    외척이 된 안동김씨 김조순 일문이 세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김조순은 벽파를 몰아내고 남인과 시파 및 안동김씨를 대거 등용한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파는 시파의 대가인 풍양조씨, 남양 홍씨,

    나주 박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등과 제휴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이 때문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잠시 풍양 조씨 일문에게 권력을 빼앗기기도 하였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를 하자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다시금 안동김씨 일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또한 철종의 비까지 안동김씨 일문에서 냄으로써 안동김씨의 외척세도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이어진다.

     순조 대에서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 대에서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 에게로 넘어갔다.

     세도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이러한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맞선 것은 그 피혜를 고스란히 보게 되는 농민층이었다.

     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 난을 비롯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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