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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대 정조 : 화성 안녕동 윤건릉(건릉)
    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3:42

    정조 임금이 작성케 한 일성록이란?

     

     

     

    일성록이란?

     

    이 책은 조선 영조 36년(1760) 1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일기이다.

    임금의 입장에서 펴낸 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현재 이 책은 2,329책이 모두 전하고 있으나, 21개월분이 빠져 있다.

     

    이 책은 정조의 세자시절『존현각일기』에서 작성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도『존현각일기』는

    계속 쓰여졌고, 『일성록』은 이 일기에 많은 기반을 두고 있다.

     

    조선 후기에 문화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정조에 의하여 기록되기 시작하여

    그 뒤 정부의 업무로서 계속되었다. 정조는 각종 기록을 집대성하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여

    국가의 의례에 이용된 문장, 과거의 답안, 신하들의 상소문 등을 종류별로 모아 책으로 엮게 하였고,

    그 뒤로도 계속 수정하도록 명하였다.

     

    『일성록』을 펴낸 목적은 그 형식이 일기인 만큼 날마다의 생활을 반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당시 펴낸 의도대로 임금이 국정을 파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모든 기록을 다시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라서 임금의

    취사선택이 있었고, 임금의 뜻에 거슬리는 내용은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보충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실록과는 달리 더욱 자세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조선 후기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하루를 반성한 기록"이란 뜻의 <일성록>은 국보153호로 지정되어 규장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정조에서 순조에 이르는 150년 동안 쓰여진 양이 2327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국왕의 일기인 일성록에는 그날그날 왕의 행동과 하루 동안 처리한 일들이 쓰여져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에 쓴 양이 20페이지가 넘는 날이 많았다.

    이렇게 매일 써 나간 것을 합치면 정조 때만 해도 673권이란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정조는 일찍이 세손 시절부터 매일 일기를 쓰던 습관을 즉위 후에도 계속 이어 갔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에게 자신이 써 온 일기를 편찬하도록 지시하며 일기의 이름을 일성록이라고 명했다.

    이 일성록은 정조 5년까지는 국왕 개인의 일기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규장각 각신들에게 매일 쓰게 하고

    끝에 작성한 신하들의 이름을 적게 함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실록과 <승정원 일기>, 또 <비변사 등록> 등 여러 가지 국가 공식 기록이 있었다.

    특히 승정원 일기는 요즘으로 치면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매일 왕의 모든 행동을

    자세하게 써 놓은 기록이었다. 이런 기록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성록을 새로운 국가 기록으로

    편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승정원 일기는 자세하기는 해도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파악하기가 어렵고

    나중에 다시 찾아보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실록은 후세를 위한 것이어서 당대에는 왕도 볼 수 없으니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500년 동안의 실록이 모두 5300만 자인데 비해 일성록은 단 150년 동안

    무려 600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에 일일이 제목을 붙이고

    필요한 자료들을 첨부해 놓아 자세하면서 보기에도 편한 기록이었다.

     

    일성록은 정조의 모든 정책에 있어 출발점이 되었는데 실록을 보면 대신들과 중요한 대책을 논의하던

    정조가 반드시 일성록에 쓰라고 요구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도 빠뜨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대목이 있다.

    바로 조선 시대의 직소 제도인 "격쟁"이었다.

     

    격쟁이란 멀리서도 단번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꽹꽈리나 징소리로 국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말한다.

    정조는 즉위하던 해에 그 동안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던 격쟁을 허용했으며

    60여 차례나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격쟁할 기회를 주었다.

     

    실록에는 정조 재위 기간 동안 30건의 격쟁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일성록에는 정조 13년 한 해에만 144건,

    재위 기간 전체로는 무려 1335건의 격쟁 기록이 있다.

    국왕의 일기에 양인에서 노비에 이르는 일반 백성들의 목소리가 이처럼 생생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전국 구석구석까지 직접 행차할 수 없는 왕을 대신해 각 지방의 사회 문제와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하는 왕의 분신이었다.

    정조 때는 암행어사 파견이 상당히 빈번하였는데 25년 재위 기간 동안 60회,

    즉 6개월에 1번씩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각 지방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암행어사는 그 즉시 왕에게 제출할 "서계"와 "별단"이라는 2가지의 보고서를 썼다.

    서계란 지방 수령들의 근무 상태와 근무 성적을 평가한 업무 보고서이고,

    별단은 각 지방의 사회 문제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 해결방안을 적은 보고서이다.

    특히 암행어사의 별단은 일성록에만 남아 있는 자료이다.

     

    그 밖에 일성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소민(小民)"이다. 소민이란 양반이 아닌 평민,

    부자가 아닌 가난한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만큼 백성들의 목소리를 중요시했던 정조는

    백성들의 억울함과 백성들이 느끼는 사회 문제를 중심으로 정책을 펴 나갔다.

     

    국왕 일기 일성록은 정조가 세종, 성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명군으로 칭송받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정조가 집념을 갖고 만들어 간 일성록에는 사회 각 계층의 생활과

    그 시대의 과학 문화의 눈부신 발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일성록을 편찬한 것은 내 덕행을 남기려 함이 아니다. 미화하지 말고 반드시 있는 그대로 쓰라.

    그래야 훗날 이 일성록을 보는 자가 오늘날 나와 각료들의 판단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가할 것이 아닌가.

     

    "일성록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보여 주고 후세에게 정확하게 평가 받기를 원했던 정조의 이러한 뜻은

    조선 왕조가 끝나는 날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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