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0대 임금인 경종의 의릉(懿陵) 』
아침 일찍 의릉을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열었는데 아, 눈이 포송포송 내리고 있는 거다. 정말 올해는 눈 많은 해다. 그리고 추운 해이고... 지난 번에 내린 눈도 덜 녹은 채 쌓여 있는데 또 내리는 거다. 아마도 올해는 농사가 대풍이 되려나보다. 눈 많은 해는 풍년이 든다고 했으니까...
가는 날이 하필 장날이라고... 별 수 없이 의릉을 답사할 마음을 접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니 눈이 그치고 쾌청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사진을 찍을 만한 날씨가 되었다. 잘됐다 싶어서 얼른 집을 나섰다.
나는 석관동에 몇 년을 살았지만 그곳에 의릉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의릉이 있는 바로 그 지역은 옛적 안기부 본부 건물이 있던 곳이어서 안기부 직원들이 눈을 반딱거리며 경비를 서고 있는 통해 감히 그 안을 들여다보기도 주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조차 그 안에 조선조 20대 임금인 경종의 릉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물론 역사책을 뒤적이면 그곳에 의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관심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랬는데 1996년에 안기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의릉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62년 중앙정보부라는 국가기관이 그곳에 들어선 이후 34년만의 일이었다. 더구나 그 앞의 소나무 숲은 이제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아침이면 조깅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널찍한 뜨락같은 공원이 조성되었으니 그 인근의 주민들로써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경종은 조선 20대 임금인데 숙종의 맏아드님으로 창덕궁 취선당에서 태어난 분이다. 그의 어머니는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옥산부대빈 장씨이다. 경종은 3살 때인 1690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717년 대리청정하다가 1720년에 즉위하였다. 경종은 원래 병약하였고 소생마저 없는 임금이었다. 그래서 즉위한지 2달 후에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대왕)을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제위 4년 만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지병으로 승하하였다.
경종이 임금이 되는 그 무렵에는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권력층의 암투가 극심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경종의 어머니가 장희빈이었는데 그 여인의 불행한 삶을 보면 당시 권력층의 정권쟁탈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권력 다툼으로 신축년과 임인년에는 대 살육전이 벌어졌는데 이 두 사화를 일컬어 신임사화라고 한다. 이때 죽고 귀양간 벼슬아치들만 수백 명에 이른다.
자세한 역사기록 들추기는 내 몫이 아니고 역사학자들의 몫이니 여기에서는 언급을 생략하기로 하고... 나는 그 치열한 권력쟁탈전을 뒤로 하고 천장산 산기슭에 세월을 잊고 잠들어 있는 옛 임금 경종의 무덤을 돌아보며 인생무상을 느낄 뿐이었다.
의릉에 도착하니 사진촬영은 직원입회하에서만 가능하며 상업용으로 이용할 사진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무슨 작품사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데 필요한 자료로 쓸 건데... 직원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촬영을 허락한다. 그래서 관리소 직원인 주복식 씨와 함께 의릉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주복식 씨는 아주 친절하고도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준다. 아따, 찬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덤이 문화재가 되는 예가 많다. 그 유명한 이집트의 피라밋도 파라오(이집트 왕)의 무덤이고... 선사시대의 고인돌도 무덤으로 만든 것이 많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중 건축물과 관련된 것은 대부분 사찰이 아니면 왕릉이다.
그런데 무덤은 당시에 살던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사상적 체계를 짐작케 한다. 요즘은 무덤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고 있지만 옛적에는 발복의 근원을 조상의 무덤에서 찾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명당에다 시신을 묻어야 후손들이 길이 복락을 누린다는 사상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것이었다.
왕릉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게 마련인데... 어찌 보면 풍수지리설은 생명체가 삶을 이어가는 데 가장 알맞은 지형을 찾아내는데 동원한 이론체계이다. 그 이론에 부합되는 지형을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명당은 햇볕이 잘 들어야 하고, 맑고 깨끗한 물이 있어야 하며 주변을 외호할 지형지물이 있어야 한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뒷산과 좌청룡 우백호는 외호의 개념이고, 새가 앉거나 눈이 먼저 녹는 곳은 양지바른 곳을 뜻한다. 이런 곳을 찾기 위해 풍수(지관, 풍수학자)는 패철(방위를 일러주는 지남철)로 해가 뜨고 지는 방향을 정확히 알아냈던 것이다. 열매맺는 자리란 것은 땅의 고도를 일컫는 것이다.
또 명당은 가까운 곳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데 그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다. 선사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에 관심을 가지다보면 그 고인돌이 모두 인근에 흐르는 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그 강물흐름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강의 의미를 영생에 두었고, 물을 생명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명당은 틀림없이 인근에 물이 고이거나 흐른다. 그런 까닭인지 의릉은 인근에 연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왕릉 입구에 만들어져 있는 연지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연지가 아니라 정보부시절에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어서 그 위치가 맞지 않다. 실제로 왕릉이 조성될 당시에는 지금보다 좀더 떨어진 자리에 연지가 있었다.
관리소 직원인 주복식 씨와 함께 왕릉에 이르니 수백 년 전의 옛날의 모습이 다소 막연하지만 상상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상여로 시신을 무덤까지 운반했다. 흔히 말하는 꽃가마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메고 가는 큰 상여였고 굴건제복(屈巾祭服, 상주의 의복차림)을 한 상주가 곡을 하며 따랐다. 상여가 지나갈 때면 그게 볼거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는 했던 것이다. 평민이 죽어도 그랬는데 옛적 임금이 승하했을 경우 장례의 규모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에는 국상이 나면 곧 "빈전, 국장, 산릉도감"을 설치해 장례준비를 하였는데 대충 6,000~9,000명 정도의 장례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 죽은 이의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하여 무덤을 썼다. 능은 임금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의 사친(私親)들과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이며,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이다.
왕릉 주변에 조성되어 있는 석물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조의 왕릉도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데 봉분 쪽으로는 섬돌처럼 장개석을 3단 형식으로 쌓았다. 첫단 공간에는 석마와 무인석, 둘째단 공간에는 문인석을 각각 한쌍식 서로 마주 보도록 세웠다. 봉분 앞에 조복하고 있는 문무인석은 임금이 거느리는 신하를 상징한다. 문인석 사이 한가운데에 팔각형으로 된 장명등(長明燈)을 앉혔다. 이 장명등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미래를 밝히는 의미이다. 마지막 단에는 봉분 바로 앞에 혼유석(상석)을 만들었고, 그 좌우로 망주석이 세워졌다. 혼유석은 영혼이 노늬는 장소이며, 망주석은 마치 남근의 형상인데 자손번성과 부활을 상징한다. 봉분 밑부분에는 12각의 병풍석을 둘러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이 병풍석에는 12간지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세조 임금이 백성들의 노고를 헤아려 이 병풍석을 만들지 않도록 하므로써 세조 이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는 릉이 많다. 의릉은 이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봉분을 중심으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두쌍을 각각 좌우로 벌여 놓았는데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의 뜻을 갖는다. 석양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다만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릉(덕종 등)은 한쌍으로 줄어 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그리고 봉분 주변에다 능을 감싸듯 앞면만 터놓은 담장, 즉 곡장(曲墻)을 둘렀다. 의릉의 경우 임금의 능에는 곡장을 둘렀지만 왕후의 능에는 곡장이 없다.
의릉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봉분이 정혈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선의왕후의 능을 앞에 조성하고, 그 뒤에 경종릉을 조성하였는데 봉분의 위치로 보면 다른 왕릉과 좀 다른 점이다.
부귀와 공명...그리고 인간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호사는 다 누릴 수 있는 자리가 임금의 자리이지만 그 치열한 권력투쟁의 현장에서 골머리를 앓아야 하고 백성을 삶을 다독이느라 편할 날이 없으니 왕노릇도 좋은 것만은 아닐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죽어 이렇게 무덤을 꾸민들 산 자들 보다 나을까... 어떻거나 이 땅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떠나야 하나보다... 그래서 인생을 나그네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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