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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대 효종 : 여주 능서 영릉
    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2:01

    조선은 518년 동안 왕조를 이어온 세계사에 드문 나라였다.

    지난 6월 26일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한꺼번에 등재됐다.

    이를 기념하여 조선왕릉을 시리즈로 다룬다.

    왕릉은 천하명당 중에 명당을 골라 만든 사후 왕과 왕비의 세계에도 왕권의 위엄와 힘이 느껴진다.

    왕릉의 규모와 각종 석조물 또한 예술품이며 자연을 거슬르지 않고 멋스럽게 단장된 자연환경이

    길이길이 어어지기를 기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격으면서도 비교적 온전히 지켜져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왕릉을 답사하면서 전문가들을 객원기자로 모셔서 왕릉에 얽힌 역사와 시대상황,

    뒷얘기를 구성해보고자 한다.

    취재에 협조해준 문화재청 관계자, 각 지역 문화유산에 혼과 향기를 불어넣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다.<편집자주>


    단순히 영릉이라고 말하면 3곳이나 되어 어느 것인지 헷갈린다.
    조선왕릉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은 경기도 여주땅 세종대왕이 영면하고 있는 영릉(英陵)이다.

    산등성이 하나 사이에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고,

    또 하나의 영릉(永陵)은 파주 삼릉에 있는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와 효순왕후릉이다.

    영릉(英陵)은 세종의 치적만큼이나 후대에도 관심과 왕릉 보존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효종의 왕릉인 영릉(寧陵)은 상대적으로 관람객이 적게 찾는다고 한다.

    조선의 4대왕 세종이 이룩한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우뚝하다.

    재위중의 업적이 탁월하여 세종대왕이라고 칭송하고, 죽어서도 세종의 왕릉은 참배객으로 항상 붐빈다.

    여주에는 남한강을 따라서 주변에 볼거리가 많고 풍광이 좋다.

    고려왕조에 3대 사찰이었던 국보 제4호 문화재가 덩그러니 남아있는 고달사지와

    영릉의 원찰인 신륵사, 목아박물관, 명성왕후 생가, 삿갓봉 정상에는 여주온천, 천서리 막국수타운이 있으며

    그 곁에 군사요충지 파사산성이 있다. 파사산성 정상에서 보는 장엄한 일몰과 일출은 장관 그 자체이다.

    ◇ 영릉(英陵)의 그림같은 잔디밭과 소나무 군락


    영릉(英陵)은 소헌왕후와 합장되어있는 단릉이다. 세종은 부인 6명에 자녀를 22명(18남 4녀) 두었다.

    영릉(英陵), 영릉(寧陵)의 면적 약 216만㎡(65만평)로 넓게 잘 단장된 곳으로 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있던 자리였는데 왕릉으로 택지되어 민간인의 무덤을 이장시킨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세종이 묻힌 왕릉은 집중관리 성역화 되어 다른 왕릉보다도 잘 관리 보존되어 있고

    소나무 숲과 잔디가 그림처럼 펼쳐져있다.

    이곳은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한다. 어쩌면 산 이름이 봉미산(鳳尾山)이니 능상에 올라서 보면

    영릉은 정말 아늑하고 포근하다.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능을 감싸고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모란꽃봉오리가 둘러싼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보기에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이라고 하며, 유명 풍수가들이 교육생을 동행하고 풍수교육을 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세종의 능은 당초에는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서쪽에서 예종 1년인 1468년에 이곳으로 천장 후

    조선의 역사가 백년 연장되었다고 전해진다.

    ◇ 영릉(英陵)의 정자각.


    실제로 세종의 능을 천장하기까지 19년 동안 왕가의 단명과 불행한 역사는 이어졌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즉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단종은 삼촌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살되었다.

    안평대군, 금성대군도 형인 세조에게 죽임을 당했고, 세조는 평생을 피부병에 시달리고 의경세자가 19세에

    급사하고, 예종은 19세인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고,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도 불과 3세에 죽었다.

    이처럼 왕과 왕손의 단명은 왕권국가에 큰 근심이고 재앙이었다.

    ◇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소헌왕후와 합장되어있는 단릉


    예나 지금이나 풍수를 절대 신봉하여 조상의 명복과 후세인의 발복을 위해서 좋은 곳에

    무덤을 마련하기 위해 유명 풍수가를 모셔서 명당을 찾기 위해 거금을 쓰고 도움을 받아왔다.

    얼마전 서거한 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고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도 그랬다.

    세종(1418~1450, 31년 6개월 재위)은 친형이자 세자인 양녕대군이 끝없는 일탈행위로 폐세자가 되고

    셋째인 자신이 세자로 책봉된 후 2개월 만에 조선의 4번째 군주가 된다.

    비록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었지만 아우인 세종의 보살핌으로 천수를 누렸다.
    둘째 형인 효령대군도 동생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자 스님으로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여

    세종~성종의 여섯 왕을 거치며 천수를 누렸다.

    세종은 뛰어난 천재성과 성실함으로 아버지 태종의 유지를 이어갔다.

    그래서 불교를 선종(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의 합)과 교종(화엄종, 종신종, 자은종, 시흥종의 합)으로 통합하여

    전국의 양종파의 18개의 사찰 총36개 사찰만 남기고 전답 7950결, 스님 3770명만 남기고 줄였다.

    종파와 사찰을 축소하여 사찰에 속했던 토지와 노비를 나라재산으로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한글을 창제한 이후부터 세종은 훈민정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아마도 그것은 처음부터 한글 창제에 관여한 신미대사와 효령대군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재위 후기에는 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훈민정음 창제 원문에 밝힌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로 시작하는

    글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민본사상을 나타내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한글은 나랏말과 똑같아 백성을 문맹에서 퇴치계몽하고 나아가 교육열로 오늘날 이만큼의 나라를

    이끈 원동력이며 발판이 되었다.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법인데,

    농사하는 것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왕자(王者)의 정치에 힘써야 한다”는 말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백성을 생각하여 만든 바른 글이란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의미로 인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글과 우리말의 현재 위상과 사용법은 어떤가를 자문해 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얼마전 한글이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인 짜이짜이족(族)의 표기 문자로 채택됐다.

    한글이 다른나라 민족의 공식 표기문자로 된 것은 처음이다.

    이제 글자가 없는 나라에 한글이 수출되어 그 나라의 모국어가 되고 있으니

    세종의 업적과 지혜는 지금도 이어진다. 장하고도 훌륭한 일이다.

    세종은 당시에 꿈도 꾸지 못할 과학으로 계량화, 통계화하여 천문지리를 밝힌 업적도 새겨야할 일이다.

    당시에 천체를 관측한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측우기 등을 만들어 과학기기로

    천체를 관측하고 시간을 관리하고 지배하게 만든 분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 같다.

    ◇ 이끼낀 영릉(英陵)의 무인석, 갑옷입은 무인의 조각이 선명하다


    세종은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토의 경계를 있게 만든 위대한 임금이다.

    하지만 세종이 이룩한 그 나라는 그 후손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으로 긴긴 세월을 크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못한 채 당쟁과 당파에만 매몰되어 있어서 정치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영릉(英陵)에서 영릉(寧陵)으로 가는 길은 약 700m의 멋진 산책로가 나있어 역사의 뒤안길을 더듬으며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는 기회가 되었다.

    ◇ 효종왕릉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을 간직한 효종의 영릉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1649~1659년, 10년 재위)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영릉(寧陵)을 찾았을 때는

    사람이 붐비지 않아 호젓함과 대자연의 푸근함으로 절로 폐부 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

    안내문에는 조선 왕릉을 지키는 능참지기가 살았던 재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왕릉의 산증인 거대한 느티나무의 위용에 신령함이 묻어난다.

    그 앞에 있는 자그마한 회화나무도 보호수라고 한다.

    ◇ 효종왕릉 재실에 있는 노거수 느티나무의 위용, 키큰 친구가 큰 매미가 되었다


    재실을 벗어나 경건한 마음으로 굽어진 마사토가 깔린 숲길을 따라 왕릉을 향해 가니 홍살문이 나오고

    바로 금천교가 나온다. 수복방과 수라간, 정자각, 비각은 전통 왕릉의 형태를 따랐다.

    효종의 영릉(寧陵)은 동원상하릉으로 위쪽 효종왕릉에는 곡장이 둘러쳐져있고

    곡장 안에 난간석과 석양, 석호,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그 아래쪽에 인선왕후는 곡장이 없이 안장되어있다. 곡장이 없는 것은 한 능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한 이불을 덮고 자듯 한 능이므로 풍수에 따라 상하릉을 조성했지만 곡장이 없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 인선왕후 한씨릉, 동원상하릉으로 곡장이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봉림대군 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인평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후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세자가 되어 인조

    다음에 왕위를 잇는다.

    효종은 아버지인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며 행한 삼배고구두례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북벌계획을 세웠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만다.

    어쩌면 임진왜란 후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병자호란은 소 잃고도 외양간도 못고친 결과가 되어버렸다.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항복한 후 국력이 쇠잔하고 무려 60만명의 남녀 백성이 청국에 끌려갔다.

    나중에 돌아온 ´환향녀(還鄕女) ´는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라고 해서 온갖

    능멸과 고초를 겪고 ‘화냥년’으로 정절을 지키지 못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 모두 나라를 지키지 못한 위정자의 책임이 크지 않는가?

    언제나 국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지나간 역사가 남긴 교훈을 곱씹으며 효종릉 주차장에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음수대의

    시원한 물로 답답하고 타는 속을 적신다.

    ◇ 밑에서 본 영릉(寧陵), 동원상하릉


    ◇ 숲길이 끝나자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이고 영릉(寧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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