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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현종 : 구리 인창 동구릉(숭릉)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3:38
조선왕조 현종 숭릉(崇陵) 동구능
숭릉(崇陵)은 조선왕조 제 18대 현종(顯宗1641~1674)과 원비(元妃)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1642~1683)룰 모신 쌍릉(雙陵)이다. 현종(顯宗)은 여론(與論)을 둘러싼
정쟁(政爭)에 시달렸으나 조선왕조의 질서(秩序)를 창설하는 등 군비(軍備) 증강(增强)에 힘썼다.
또한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고 동철활자(銅鐵活字)를
주조(鑄造)하였다. 숭릉의 정자각(丁字閣) 팔작지붕으로 다른 능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정면 3간 측면 2칸에 익량이 붙어 있다.
효종의 맏아들로 아버지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이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태어났다.
현종(顯宗)은 즉위 직후 할아버지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喪服)문제를 놓고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현종의 부왕인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맏아들에 대한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효종의 상(喪)에는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 측에서는 송시열(宋時烈) 등의 1년 상복을 주장과 남인 측의 허목(許穆)등의 3년상
주장에 휩싸여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의 정쟁을 격기도 하였다.
헌종은 군비강화에 힘써 불랑기(佛狼機-대포) 50정, 정찰자포 200문을 만들어 강화도에 배치했다.
재정구조를 확립하기 위해서 호구수를 증가 시키고 양민이 머리깎고 중이 되는 것을 금했다.
보통 양민 확보책의 일환으로 공적으로 사적으로 천한 사람도 양처(良妻-어진 어머니)의
소생은 양인(良人)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동성통혼(同姓通婚)을 실시하였다.
1660년 강화도의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이 사고(史庫)를 마련해 1665년에 등서(謄書)한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였으며 숙종 즉위 초에는 조정의 정무에까지 관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명성왕후는 궁내의 남인세력의 여자들을 추방하는 것에도 관여하였으며
당시 남인가의 여인이었던 숙종의 여인 장옥정(훗날 장희빈)을 궐밖으로 내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1683년 12월 창경궁에서 42세로 사망하였다.
왕비가 된 2년 후 1661년 8월에는 현종과의 사이에 원자인 숙종을 낳았다.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사이에 숙종과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3공주를 낳았다.
지금 숭릉은 대대적인 보수를 하고 있다. 숭릉분 아니라 모든 왕릉들이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계기로 철저한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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