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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태조
    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1:40
    ?~918(고려 태조 원년).
    후고구려의 왕(901~918 재위).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
    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지금의 평창)·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저족(猪足:지금의 인제)·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이해에 왕건에게 바닷길로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케 하여 서해상권을 장악하고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처럼 강성한 세력을 이루어가면서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포섭하는 등 신라에 대한 강한 적의를 보이고 신라 사회를 파괴시켜갔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 되자, 918년(정개 5)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바꿔입고 도망가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

    고려 태조

    고려의 황제
    재위 918년 ~ 943년 음력 5월 29일
    황후 신혜황후
    장화황후
    신명순성황후
    신정황후
    신정황후
    정덕황후
    부친 세조
    모친 위숙왕후
    이전 왕 태봉 궁예
    다음 황제

    혜종     

    태조(太祖, 877년 음력 1월 14일(양력 1월 31일)) - 943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4일))는

    고려 왕조의 초대 국왕(재위기간 : 918년 6월 - 943년 5월)이다.

     

    은 왕(王), 는 건(建), 는 약천(若天),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다.

    연호는 천수(天授)이다.

     

    왕건은 송악의 호족 왕륭(王隆,세조)과 그의 부인 위숙왕후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스무 살 되던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후고구려의 장수가 되었다.

    전장에서의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던 그는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의 지위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918년에 궁예가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며

    공포정치를 행하자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의 장수들을 기반으로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창업 후에는 당시 최대의 맞수였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며 쟁패를 거듭하였고,

    그 과정에서 죽을 뻔한 위기도 여러 번 넘겼으나, 935년에 견훤이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

    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렸다[편집] 출생

    전설에 따르면, 왕건은 서해 용왕의 외손자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의 역대 임금들은 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의 후예라고 믿어 왔다.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도선대사(道詵)란 고승이 문 밖에서 이것을 보고 “북쪽으로 옮겨 지으면

    이곳에서 세상을 구할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왕륭에게 새 집터를 잡아주고 이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뒤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륭의 부인 한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 음력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建)이라 지었다.

    성 장

    왕건의 릉에 있는 비
     

    왕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왕건이 17살이 되자 도선대사가 다시 송악으로 왕건을 찾아와 그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가르쳤다.

    895년(진성여왕 9) 왕륭과 왕건 부자는 중부 지방의 강자로서 세력을 떨치던 궁예(弓裔)를 찾아가

    미련없이 송악을 바치고, 그 밑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에 오른 왕건은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으로

    연이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900년(효공왕 4)까지 광주(廣州)와 국원(國原, 충주),

    당성(唐城, 남양) 등지를 평정하였다. 특히 후백제견훤(甄萱)과의 대결에서는 903년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여 나주 등지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게 하였으며,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 뒤로 왕건은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었고,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였다. 909년 진도(珍島) 부근의

    도서(島嶼)를 공격하고 금성(錦城)을 정복하였다. 또한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변방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의 지위에까지 올라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궁예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겼다.

    즉위

    그러나 이후 궁예의 폭정이 극심해지자 918년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박술희 등의 추대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추대되어, 918년 음력 6월 15일 철원 궁예궁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데서 고려,

    연호를 천명을 받았다는 뜻으로 천수(天授)라고 하였고, 919년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松嶽)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태조는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대내적으로는 궁예가 저지른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빈민 구제 기구인 흑창을 설치하고 세금을 낮추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에 반대하는 호족들을 줄이기 위해 정략 결혼을 통한 호족 세력과의 융합에도 주력하여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정권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해 갔다.

    또한 북진정책과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왕건은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한 반면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대결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려는 처음에는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였으나, 930년 고창 전투 이후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점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통  일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된 황릉인 현릉(顯陵)
     

    926년(천수 9)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무너져 망명해 온 발해의 유민들을 흡수하고,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936년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그 후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 융화·결혼 정책을 쓰고 귀족은 예로서 대접하였고,

     사심관·식읍(食邑)·호장(戶長) 등을 주어 회유하였다. 한편 숭불정책을 써서 불교를 국교로 삼아

    사원을 지었고 승려를 우대하였으며, 신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학(敎學)·사상(思想)·민간신앙을

    적극 보호하였고, 도참(圖讖)을 믿어 보호하였다.

     

    같은해 왕건은 《정계(政戒)》, 《계백료서(誡百療書)》 등을 내어 왕권을 확립하고 고구려

    고도 서경을 주요시하고, 그곳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 땅을 찾으려는 북진 정책(北進政策)의

    전진 기지로 삼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渤海)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였으며, 거란이 발해를 멸한 후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 망

    943년 임종을 눈 앞에 두고 고명대신인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는 귀감으로 남겼다고 한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개성에 위치한 현릉(顯陵)이다.

    태조의 뒤를 이어 차비(妃)인 장화왕후(莊和王后)에게서 난 아들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혜종(惠宗)이다.

     

       가    계

    • 할아버지 : 작제건
    • 아버지 : 용건 (왕륭)
    • 숙목부인(肅穆夫人)
      • 원녕태자(元寧太子)
    •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 효성태자(孝成太子)
      • 효지태자(孝祗太子)
    •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 일후공주(一後公主)
    • 대량원부인 이씨(大良院夫人)
    • 대명주원부인 왕씨(大溟州院夫人)
    • 광주원부인 왕씨(廣州院夫人)
    • 소광주원부인 왕씨(小廣州院夫人)
      • 광주원군(廣州院君)
    • 동산원부인 박씨(東山院夫人)
    • 예화부인 왕씨(禮和夫人)
    • 대서원부인 김씨(大西院夫人)
    • 소서원부인 김씨(小西院夫人)
    •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 신주원부인 강씨(信州院夫人)
    •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 효제태자(孝悌太子)
      • 효명태자(孝明太子)
      • 법등군(法燈君)
      • 자리군(資利君)
    • 의성부원부인 홍씨(義城府院夫人)
      •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 월경원부인 박씨(月鏡院夫人)
    • 몽량원부인 박씨(夢良院夫人)
    •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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