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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대 정종 : 개성 판문 후릉
    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1:43
     

     

     사진 : 한겨레

     

     

    후릉(厚陵)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해방시 주소,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북한 문화재 보존급 제551호


    조선의 왕릉 중에는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더불어 북한땅 개성인근에 있는

    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릉의 형식을 따라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을 두르고 있으며, 석마를 동원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2쌍 씩 배치하였다.

    1412년(태종 12) 6월 25일 정안왕후가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후릉에 안장되었고 그로부터 7년 뒤

    정종이 승하하여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후릉은 곡장이 없어진걸 제외하면 봉분 주변의 석물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걸로 보인다.

    하지만 정자각이 없어져 앞이 허전해 보이고 정자각 자리 앞에는 연못으로 추정되는 믈이 보인다.

    울창해야할 소나무 대신 능 좌우로는 활엽수들이 앙상하고  능역 가까이까지 논, 밭이 들어와 있음도 보인다. 

     

     

    편안했던 정종과 정안왕후의 삶.

    정종은 조선의 왕들 중 가장 편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애초부터 왕위에 오를 생각도 위치에 있지도 않았었기에 짧았던 재위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으니 말이다.

    1357년(공민왕 6년)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3377년(우왕 3년) 에는 아버지를 따라 지리산

    부근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89년(창왕 1) 절제사 유만수(柳曼殊) 밑에서 해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1390년(공양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했다.

    조선이 개국되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보위를 걷어찬 태조에게 큰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는다

    (1398년 9월. 태조의 맏아들 이방우는 이미 몇 년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실제 권력은 이미 동생 이방원(李芳遠)에게 있었으니 왕위에 오르면서 개경으로

    다시 천도(1399년, 정종 1년3월) 한 것도 야심만만한 동생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2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실질적인 권력자인 동생의 섭정이 있었기에 정치로 인해 신경 쓸 일도

     많지 않았을 것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달플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이렇게 원치 않았던 왕위도 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방원을 세제(世弟)로 책봉했고

    같은 해 11월 세제 방원에게 선위(禪位)했다.

    그 뒤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20년 가까이를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연희를 즐기며

    편안한 생활을 했다.

    이렇게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권력욕이 컸던 동생 태종과도 우애를 유지했고

    태종은 형을 선후로써 예우했다.

    정안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후사 문제로 걱정할 일도 없었고 설령 그들에게

    아들이 있었던들 언감생심 후사를 바라볼 처지도 아니였다.

     

    이처럼 삶을 즐기던 정종과 정안왕후는 실권을 놓고 인덕궁으로 물러난지 12년이 되던해인

    태종 12년(1412년)에 정안왕후가 춘추 58세로 세상을 떠났고 아내 사후 7년뒤인 세종1년(1419년) 정종도

    인덕궁에서 생을 마감하니 춘추 63세였다.

    정종과 정안왕후의 부부 묘소는 인덕궁 근처 야산에 마련되었는데 바로 개성 인근의 후릉이다.

    사후 처음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420년 명(明)나라로부터

    공정(恭靖)의 시호를 받아 공정왕으로 불리다가(그래서 실록도 ‘공정왕실록’ 이다)

    1681년(숙종 7)에 비로소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후릉 평면도

     

     

     

    후릉이 위치한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는 강화도 북안의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의 건너편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정종과 정안왕후가 한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인근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았을 모습이 상상이 간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인덕궁 가까이에 후릉도 함께 있다.

    강화읍 북쪽의 서장곡돈대에서 한강 건너의 후릉은 직선거리로 3~4km 정도밖에 떨어지지않은 곳인데

    혹시 맑은 날이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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