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4대 세종 : 여주 능서 영릉
    산행 과 여행/국보, 고궁, 왕릉 탐방 2009. 9. 15. 11:46
    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의 제4대 왕(1418~50 재위).
    세종 영정 /세종 영정, 경기 여주군 ...
     
    재위기간 동안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이름은 도( ).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다.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즉위 및 유교적 지배체제의 확립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다.
    당시 왕세자는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태종은 충녕이 왕위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했다. 같은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의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된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이어받아
    국정을 직접 관장했다. 그후 왕권이 안정되자 6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했다(1436).

     

    이는 집현전에서 성장한 많은 학자들이 의정부의 지나친 권력행사를 견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아울러 세종은 승정원(承政院)의 기능을 강화해 실제적으로는 이를 통해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1420년 설치된 집현전(集賢殿)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교육과 각종 학술연구·서적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신숙주·정인지 등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학자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한편 세종은 태조 이래의 억불숭유정책을 계승해 이를 정치이념이나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사회윤리의 측면에까지 확대했으며, 〈효행록〉·〈삼강행실도〉·〈주자가례〉를 간행·보급해
    유교적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유교적인 의례(儀禮)를 확립하기 위해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에서 국가의 의례인 오례(五禮), 사서(士庶)의
    관혼상제에 관한 사례(四禮) 등에 대한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게 해 이를 정리했다.
     
    이와 함께 1419년 사사노비(寺社奴婢)의 정리를 시작으로,
    1424년 오교(五敎 : 慈恩敎·華嚴敎·始興敎·中道敎·南山宗)와 양종(兩宗 : 曹溪宗·天台宗)을
    선교(禪敎) 양종으로 정비해, 각각 18개의 사찰만을 인정했다.
    또한 이에 소속된 7,760결(結)의 토지 외에는 모두 몰수하는 등 불교를 억압했으나 왕실에서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거나 불교행사를 갖는 일은 가끔 있었으며, 세종도 유신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佛敎全廢論)에는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특히 말년에 두 아들과 왕비를 잇달아 잃고
    자신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가 숭유정책(崇儒政策)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종이 재위한 15세기 전반기는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
    군현제(郡縣制)가 정비·확립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세종은 그의 치세 동안 태종이 이룩해 놓은
    지방통치체제의 기반을 계승하면서 토호적 향리를 제거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 행정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기 위한 수령육기법(守令六期法)과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의 실시,
    도와 군현 구획의 부분적 개편, 임내(任內)의 정비, 양계(兩界) 신설주진(新設州鎭)의 개척에 따른 구획과
    사민입거(徙民入居) 및 유향소(留鄕所)의 복설, 경재소(京在所)의 효율적인 운용 등 지방통치면에서
    획기적인 치적을 남겼다.
    이와 더불어 관리의 등용·녹봉 체계를 고치고, 언로(言路)를 보장하는 등 관료제도를 정비했다.
    관리등용제도로는 과거제도 이외에 취재제도(取才制度)를 실시해 지방의 수령(守令)·이서(吏胥)·
    문음(門蔭) 출신자 등에 대한 선발기준을 마련했다. 아울러 실직품관(實職品官)으로 흡수하기 어려운
    종친·공로자·연로자 등에게 관직 없이 관계(官階)만을 주는 산관제도(散官制度)와, 잡직관인(雜職官人)·
    품외관인(品外官人)에게 교대로 녹봉을 받게 하는 체아제도(遞兒制度)를 실시해
    관직에 대한 과다수요를 조절했다. 이외에도 백관(百官)이 교대로 왕과 정사를 논의하게 하는
    윤대법(輪對法)을 실시해 언론의 활성화를 꾀했다.
     
    한편 법제적인 면에서는 1422년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속육전 續六典〉을 편찬하기 시작해
    여러 차례의 개수(改修)를 거쳐 1435년에는 완성을 보았다.
    또한 형벌제도를 개혁하여 가혹한 고문으로 피심문자(被審問者)가 죽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죽을 죄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심(三審)을 받게 하는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했다.
    1444년에는 노비를 노주(奴主)가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도록 하고 위반한 자는 처벌하게 했다.

     

    경제정책
     
    세종은 국가의 수입을 증대하고 민산(民産)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기술을 발전시키고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태종 때 보급된 〈농상집요 農桑輯要〉가 중국 화북지방의 농법을 다룬 것이어서 조선 농업의 중심지인
    삼남지방의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편찬했다.
    이는 삼남지방의 농업관행을 기초로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법을 보급하려 한 것이었다.
     
    〈권농교문 勸農敎文〉에서는 목민관들에게 권농의 이념과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유의사항을 지시했다.
    또한 세종대에는 농업 재생산력의 보존과 사회안정책의 일환으로 진휼정책이 가장 빈번하게 시행되기도 했다.
    한편 토지분급제도도 일대 개혁이 단행되어 1431년 새로운 급전법(級田法)인 4등순급법을 마련해
    과전(科田)의 지급량을 축소하도록 했다. 또한 공신전(功臣田)의 지급을 대폭 감축하는 등
    개인에게 지급하는 과전의 총량을 크게 줄이고 나머지는 국가기구로 돌려 전체적으로 국가재정을
    증대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이는 곧이어 제정되는 공법의 정지작업이었으며
    하삼도사전(下三道私田) 환급의 전제가 되는 것이었다.
    조세제도의 개혁에서 가장 큰 업적은 공법(貢法)의 제정이었다.
    과전법(科田法) 체제에서의 조세규정은 지역마다 차이가 나는 토지비옥도를 상세히 고려하지 않아
    조세징수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가, 실제 풍흉을 조사하여 세액을 결정하는
    답험손실(踏驗損失)에도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즉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공전(公田)에서는 수령이,
    전주(田主)에게 조(租)를 납부하는 사전(私田)에서는 전주가 답험을 담당했으므로 이들의 농간에 따라
    공평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세종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
    1443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세우고 이의 개선을 연구하게 했으며,
    1444년 공법을 시행했으며 여기에서는 풍흉과 토지비옥도의 차이에 따라 각각 9등급과 6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의 차이를 두는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전분6등법(田分六等法)을 실시해 조세의 공평을 도모했다.
    이때의 세율은 과전법에서의 1/10에서 1/20로 감소되었지만, 토지가 비옥한 삼남지방이
    대부분 높은 등급으로 책정되었으므로 국고수입은 크게 증가했다.
    농민의 경우는 결당(結當) 기준 세액이 300두(斗)에서 400두로 늘어나 세율의 인하만큼
    부담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전주나 관리의 자의적 중간수탈이 배제되어 그 부담이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대외정책
     
    세종의 대외정책은 태조 이래의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왜·여진 등에 대한 교린(交隣)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에서는
    처녀진헌(處女進獻)과 금은조공(金銀朝貢)을 폐지하는 등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했다.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두만강·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고
     6진(六鎭)·4군(四郡)을 설치, 이곳에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왜에 대해서도 1419년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1423년 삼포(三浦)를 개항하면서 회유책도 병행했다.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1443년 계해조약을 맺어 세견선(歲遣船)과
    세사미(歲賜米)의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했다.

     

    문화의 발달과
    훈민정음의 창제
     
    세종대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문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을 비롯하여 음악·미술 등 예술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훈민정음의 완성과 반포는 이 시기 문화유산의 결정이라 할 만하다.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간행사업은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 등의 역사서, 〈
    사서언해〉·〈대학연의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 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 明皇誡鑑〉·〈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
    ·〈동국정운〉 등 훈민정음이나 음운·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 등의 의서, 〈농사직설〉 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중국문학·천문·병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유교의례가 정리되면서 이에 필요한 음악이 크게 발달했다(→ 색인 : 한국음악).
    여러 악기를 조율할 수 있는 율관(律管)이 제작되고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정간악보(井間樂譜)가 만들어지는 등 음악학이 발달했고,
    조회아악(朝會雅樂)·제례아악(祭禮雅樂) 등 아악이 정비되었다.
     
    이러한 음악의 발달은 박연(朴堧)이라는 뛰어난 음악가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음악에 조예가 깊은 세종의 역할도 컸다. 1443년 완성되어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와 해설서, 한문서적의 언해서를 간행하고 활자를 목각하는 등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일반 민(民)들에게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보급시켜 유교윤리에 바탕을 둔
    교화(敎化)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밖에 춘추관·충주·전주·성주 등에 실록 보관을 위한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과학기술의 발달
     
    세종대에는 과학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천문기상 부문에서는 1434년 천체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가 준공되었다. 이곳에 설치된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 등 천문관측기기는
    송·원의 과학기술의 영향과 고려 때까지의 우리나라 천문과학의 유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괄목할 만한 것으로 해시계·물시계·측우기의 발명을 들 수 있다.
    해시계로는 정초·장영실(蔣英實) 등이 발명한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물시계는 흐린 날이나 밤에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표준시계로 쓰였다.
    1398년에 이미 경루(更漏)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가 있었지만,
    세종대에는 장영실이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
    더욱 발전한 물시계를 만들었다. 1441년 측우기의 발명은 빗물이 땅속에 스며드는 깊이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개선해 과학적이고 수량적인 강우량 측정을 가능하게 했다.
    이밖에도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이라는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발달한 중국·이슬람의 천문학과 역법의 계산방법을 흡수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독자적 역법계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술의 발달이다.
    태종 때인 1403년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만들어졌으나 글자의 모양과 크기가 매끈하거나
    고르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즉위초부터 새로운 금속활자 인쇄기술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은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甲寅字 : 1434)·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활발한 간행사업의 수행은 이러한 인쇄기술의 발전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1431, 1446년에는 도량형 제도가 확립되었다. 아악에 사용되는 황종관(黃鐘管)의 길이와
    그 속에 담기는 물의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도량형 제도는 그뒤 〈경국대전〉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포의 주조기술과 화약 제조기술도 단순한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했다.

    천자화포(天字火砲)·지자화포(地字火砲) 등 새로운 화포를 개발했으며,
     
    총통등록 銃筒謄錄〉을 편찬하여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정확한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했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2010년 설연휴때 고향방문하고 둘러본 사진 올려 본다

     

     

     

     

     

     

     

     

     

     

     

     

     

     

     

     

     

     

     

     

     

     

     

     


     
     
Designed by Tistory.